맛도 이야기도 달달한 설탕

설탕 안에는 많은 이야기들이 숨겨져 있다.

스트레스를 받거나, 고된 일을 하다 힘이 들때면. “나 당 떨어졌나봐! 힘이 안나.”하며 단 것을 무의식적으로 찾을 때가 있다. 실제로 지친 뇌를 활성화 시켜 행복감을 느끼게 하는 요소가 바로 설탕이다. 맛도 달콤하지만, 설탕 속 이야기도 참 달콤해 알면 알수록 눈도 달콤해진다. 과연 어떤 이야기를 품고 있을까?

#1. 알렉산더대왕이 깜짝 놀랐던 “설탕”

설탕의 이야기를 머나먼 과거로 옮겨보겠다. 기원전 4세기경 이미 인도에서는 설탕을 제조하고 있었다. 설탕의 원료는 다들 알다 싶히 사탕수수이다. 연평균 20도 이상인 열대, 아열대지역에서 재배되는데 현재는 쿠바, 태국, 호주 등지에서 설탕이 생산되고 있다. 최초로 탄생된 곳은 인도라고 생각하겠지만, 틀렸다! 설탕은 태평양 남서부에 위치한 뉴기니 섬이라는 곳에서 처음으로 탄생되었다. 무려 기원전 8000년경에 설탕이 생산되기 시작하였다. 생산이 되자마자 이곳저곳 옮겨다니며 마침내 설탕 생산의 원조국인 인도에 도착하게 되었다.

알렉산더가 인도에 침략했을 시절. 설탕에 맛을 본 알렉산더는 갈대의 줄기에서 꿀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게 되었다. 그는 사탕수수를 가리켜 꿀벌 없는 달콤함이라 지칭했고, <돌꿀>이라 백성들에게 소개하기 시작했다.

#2. 전쟁까지 나 몰라라 했었던 그 상품 “설탕”

소개된 후 그리스와 로마에 퍼지게 되었고, 이것이 다시 아랍과 중국, 터키와 북아프리카로 설탕이 보급, 무역거래가 이뤄지기 시작하였다. 중국이 불교에 심취를 할 때쯤 인도와의 종교가 성격이 똑같아서 많은 교류가 있었는데 중국에서는 설탕을 가장 비싼 교역물품이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설탕은 그렇게 달달하지 않았다고 한다. 약품, 향신료, 장식재료, 방부제로 쓰였을 뿐 그렇게 식량으로써 역할은 하지 못했다. 한편, 이슬람제국을 건설한 아랍인들은 설탕의 단맛에 행복하기 시작했다. 설탕이 어떤 일을 하지 못하게 할 만큼 그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기 시작하였는데. 그 정도가 심각했다. 이슬람에게 영토를 빼앗긴 십자군은 전쟁을 하던 도중 설탕을 알게 되었고, 일부는 전쟁을 나몰라라 하며 설탕의 맛에 매력을 느끼기 시작하여 여기서부터 유럽권으로 설탕이 진출하는 계기가 되었다. 일부 유럽권의 귀족들은 사탕수수 경작지만 있는 것이 곧 부의 상징이고, 모든 세계를 지배할 수 있다 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어 성을 먼저 점령하다기 보다도 사탕수수 재배지부터 점령을 하였다.

삼각무역이 처음 생기게 된 때가 바로 설탕을 교역했을 때였다.

#3. 콜럼버스의 새로운 발견은 “설탕”

1493년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으로 두 번째 항해를 시작했을 때 그의 눈에는 이상한 식물을 발견하였다. 초록색처럼 긴 식물은 딱딱한 대나무도 아니고 생으로도 먹을 수 있었고, 만진 자국에는 달달한 향이 느껴져 심상치 않다고 느낀 그는 카리브 해의 아이티 섬으로 가져가면서 사탕수수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것이 다시 쿠바, 자메이카 등 카리브 해 전역에 사탕수수가 심어지게 되면서 이후 멕시코에 설탕 공장이 들어서게 되었고, 아메리카 전역에 퍼지게 되면서 설탕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었다.

포르투갈의 잔인했던 혁명 "설탕혁명"

#4. 설탕이 달달하기 까지 그 과정 속에는 쓴맛도 있었던 “설탕”

유럽에서 먼저 독점을 한 국가는 포르투갈이다. 당시 포르투갈은 설탕을 제조하는 법을 재배하기 전에 알고 있어서 다른 국가에 비해 관리가 수월했다고 한다. 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한 혁명이 바로 “설탕혁명”인데. 인간을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고, 아프리카인들을 대거로 잡아와 노예처럼 부려 설탕 플랜테이션에서 강제노동을 시킨 것이었다. 당시에는 기계도 없어 인간의 노동력을 마치 걸레처럼 쥐어짜듯 잔인한 방식에 의해 운영이 되었다고 한다.

설탕 하나로 인해 잔인하게 변한 포르투갈은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 등 유럽 전역의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 정부는 이러한 사실을 알고도 묵인하였다. 이때부터 삼각무역이라는 용어가 처음 나오게 되었다. 사탕수수를 재배하고 설탕을 제조할만한 철기구가 유럽쪽으로 떠나면, 아프리카에서는 노동력이라는 노예와 교환되고 다시 인도에 도착을 하게 되면 설탕과 바뀌는 식으로 거래가 이뤄졌다.

#5. 서민들에게 대중적으로 자리잡은 “설탕”

이제는 귀족들만 맛 보는 것이 아닌 서민들에게도 설탕이 소개되었다. 유럽권에서는 설탕의 최대 소비국가로 불리던 영국은 값싼 설탕이 노동자의 열량 공급원이 되어줘 제 1차 산업혁명에 기여하였다. 식생활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는데 특히나 당분이 많이 들어간 비스켓, 빵, 홍차가 그들만의 만찬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때부터 다른 식물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바로, 사탕무이다. 이전에는 사탕수수로 많은 돈을 벌어드렸지만, 산업혁명으로 인한 기계화로 인해 사탕무에서 단 성분을 추출할 수 있게 되었고, 값싼 설탕이 앞도적으로 증가하게 되어 설탕은 이제 귀한 존재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6. 보이지 않는 싸움, 새로운 무역환경을 조성해 준 “설탕”

당시, 노예무역이 급증해져 전 세계에서는 이것을 막아야 된다는 여론이 형성되었다. 인식이 조금 달라졌는데. 설탕이 우리들의 부이지만, 설탕을 만들어주는 노예라는 존재도 우리들의 부라 여겼기 때문이다. 유럽에서는 이미 공정한 무역을 실시하기 위해 노예를 해방시켰지만, 미국은 몰래 노예 중심의 설탕산업을 만들어 부를 축적하기에 바빠 세상에 알려지지 않기 위해 온갖 묵인 방식을 사용했다고 한다. 2009년 설탕이 급격히 감소하자 미국은 발 벗고 나서 모아둔 설탕을 다시 판매하게 되었는데 이것을 이상하게 느낀 유럽연합에서 항의를 하여 무역환경에 있어 전반적으로 신경전이 오고 간 적이 있었다.

설탕 독점사업을 펼쳐왔던 CJ제일제당

#7. 한국의 “설탕”

우리나라는 고려시대 때부터 설탕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중국에서 온 하얀색 가루가 이상하게도 행복감을 느끼니 이것을 마약으로 여겼지만 알고보니 약재로도 쓰여 귀한 존재로 쓰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일제 강점기에 일본이 설탕공장을 세워 마치 아프리카의 노예처럼 노예생산 중심의 설탕을 생산한 적이 있었다. 6.25전쟁 이후 CJ제일제당이 우리나라 최초로 설탕 생산에 성공을 하게 되면서 독점적인 사업이 가능해졌다. 설탕 생산이 성공되었다 하지만, 우리나라 서민들은 쉽게 먹지 못했다. 설 명절에 선물로 들어온 설탕 포대 수가 그 사람의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척도였다고 한다. 당시 설탕값은 오늘날의 한우 등심 1등급과 같은 가격이였고, 1970년대부터 대중화 되면서 일반적인 선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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