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시장 속 변곡점에 놓여있는 K-POP, 그 중심에는 그동안의 스테레오타입을 벗어나려는 강력한 움직임이 있다.

당신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걸그룹의 대표 주자는 누구인가? ‘다시 만난 세계의 청순함으로 마음을 울렸던 소녀시대, 아니면 샤샤샤~” 한 마디로 전국을 쓰러뜨렸던 트와이스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다시 한 번 물어보자, 지금 떠오른 그 그룹은 몇 세대에 속하는 아이돌인지 알고 있는가?

서울문화사 매거진은 지난 9월 발표한 기사에서 아이돌 세대론을 말한다. 그동안 암암리에 팬들 사이에서나 언급되던 세대론이 수면 위로 떠오르지 못했던 것은 이를 분리하는 명확한 기준에 대한 합의점을 찾지 못했을 뿐더러, 이에 앞서 애초에 특정한 담론을 형성할 만큼의 활발한 소통이 이루어지는 장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걸그룹 핑클(Fin.K.L) / 네이버 공식 프로필
걸그룹 핑클(Fin.K.L) / 네이버 공식 프로필

1990년대 이전까지 아이돌이라는 개념이 전무하던 시기가 있었다. 이후, 일본의 아이돌 육성 시스템과 미국 엔터테인먼트 산업 트렌드를 본따 SM엔터테인먼트와 DSP미디어(당시 대성기획)에서 내놓은 그룹, H.O.T, 핑클, 젝스키스, S.E.S 등이 1세대에 해당한다. 이후 경제 성장의 가속화에 힘입어 글로벌 시장 진출 및 현지화를 표방한 2세대 아이돌이 등장한다. 소녀시대, 빅뱅, 원더걸스, 카라, 슈퍼주니어 등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3세대는 탈국경화와 각종 SNS의 폭발적인 성장을 기반으로 삼아 보다 더 자유로운 활동 영역을 추구한다. 대표적인 그룹으로는 EXO, 방탄소년단, 위너, 갓세븐, 오마이걸, 레드벨벳 등이 있다.

그 다음이 바로 지금, 4세대 아이돌이다. 과도기를 거쳐 데이터를 수집하고, 이와 더불어 각종 포트폴리오를 안정적으로 구축한 K-POP의 새로운 변화는 어떤 모습일까?

현 시대에 일어나고 있는 변화를 온전히 분석하는 것은 절대 간단한 일이 아니다. 대부분의 연구는 데이터와 인과 관계에 대한 분석과 신뢰성이 이를 뒷받침하는 반면, 엔터테인먼트는 상품의 생명 주기가 아주 짧다는 특수성으로 인해 공통된 현상이나 발전 방향성에 관한 논의가 이루어지지 못한 것도 현실이다.

4세대 아이돌에게서 두드러지는 변화를 걸그룹에서 눈에 띄게 찾아볼 수 있는 것도 바로 그 이유이다.  K-POP 시장에서 걸그룹이 이룬 생태계는 다소 독특한 양상을 보여줘왔다.  

걸그룹 르세라핌(LE SSERAFIM) / 뉴스원 기사 '르세라핌, 신보 '안티프래자일' 초동 56만장 판매'
걸그룹 르세라핌(LE SSERAFIM) / 뉴스원 기사 '르세라핌, 신보 '안티프래자일' 초동 56만장 판매'

우선, 현 시대에서 아이돌의 객관적인 성공 지표는 음원과 음반 판매량이라 할 수 있다. 둘 중 수익성을 판가름하는 것은 단연 음반 판매이며, 긴 시간 동안 음반 시장은 여성 팬들이 주도하는 보이그룹의 전유물이었다. 디지털 시대에서 앨범은 음악을 감상하기 위한 직접적인 장치보다는 일종의 굿즈로서의 성격을 갖게 되었고, 이는 여성 팬들의 충성도로 뒷받침되어 견고한 그들만의 리그를 형성해왔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지난 7월 발매된 4인조 걸그룹 에스파의 미니 앨범 <Girls>는 초동 판매량 112만 장을 기록하였으며, 8월 발표된 대세 걸그룹 아이브의 <After Like> 또한 발매 이틀 만에 60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하며 걸그룹에게는 불가능으로 여겨졌던 밀리언셀러의 벽을 깨부순 것이다. 실제로 알라딘이 제공하는 앨범 구매자 분포 자료에 따르면 뉴진스의 데뷔 앨범인 <뉴진스(NewJeans) 블루북>의 구매자 중 여성의 비율은 88.6%에 달한다.
주체적인 여성상이 사회적인 메가 트렌드로 떠오른 사회 분위기 속에서 걸그룹을 통해 자아를 투영하고, 이를 넘어서 지향점을 탐구해나가고자 하는 일종의 대리만족의 욕구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뉴진스(NewJeans) 블루북 / 위메프 뉴진스 블루북 판매 페이지
뉴진스(NewJeans) 블루북 / 위메프 뉴진스 블루북 판매 페이지

또한, 걸그룹의 생명 주기는 보이그룹이나 여타 솔로 아티스트에 비해 매우 짧은 편이다. 흔히들 3년에서 5년의 벽을 말하는 것처럼, 걸그룹이 하나의 컨셉으로 지속될 수 있는 시간은 다소 짧은 편이다. 팬덤 또한 충성도가 다소 낮은 터라 일시적인 유행이 지나가고 나면 이를 지속할 수 있는 지구력을 마련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이처럼, K-POP이라는 산업군에서 수익성과 지속 가능성 면에서 비교 우위를 점할 수 없는 걸그룹이라는 일종의 상품은 이렇게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고요히 몰락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4세대 아이돌은 제 능력껏 아이돌의 계보를 지켜냈다. 철저하게 이성애적 관점에서 설계된 기존의 아이돌 산업에서 걸그룹이 할 수 있는 것은 섹시함이나 청순함에 그쳤으나, SNS를 통한 느슨하고 세심한 덕질이 가능한 시대가 도래하며 점차 그들이 어떤 메시지를 노래하느냐, 에 대한 질문이 시작된 것이다. 4세대 걸그룹은 기다렸다는 듯 이러한 질문에 화답하기 시작했다.

 

첫째. 그 누구도 아닌 에 대한 사랑

그동안 대다수의 걸그룹이 말하는 사랑 노래의 청자는 '오빠'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이제는 당당하게 자기 자신을 사랑할 것이라 말하는 소녀들이 화제의 중심에 서있다. 

걸그룹 아이브(IVE) / 스타쉽 엔터테인먼트 공식 홈페이지
걸그룹 아이브(IVE) / 스타쉽 엔터테인먼트 공식 홈페이지

'자기애'를 노래하는 아티스트를 이야기하며 가장 먼저 알아야 할 그룹은 스타쉽엔터테인먼트 소속 6인조 걸그룹 IVE(아이브)이다. 트렌디하고도 경쾌한 멜로디는 물론, MZ세대 답게 나 자신을 사랑한다는 당찬 메시지를 전달하는 아이브는 데뷔곡부터 트리플 크라운을 석권, 13관왕하며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후 4개월 간격을 두고 발매한 새 앨범 또한 마찬가지이였다. 그리스 신화 속 나르키소스 설화를 모티브로 하여 스스로를 향한 사랑에 과감히 뛰어들겠다고 말하는 ' '러브 다이브(LOVE DIVE)'와 '애프터 라이크(After Like)' 역시 뜨거운 반응을 몰고 왔다. 

또다른 걸그룹인 '르세라핌(LE SSERAFIM)' 은 또다른 측면에서의 '자존감'을 말한다. 그룹명부터 'IM FEARLESS(나는 두려울 것이 없다)'라는 문구를 애니어그램을 통해 재조합한 이들은 데뷔곡 <Fearless>와 지난 10월 발매한 미니 앨범 <Antifragile>에서 두려움이나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게 살아가고자 하는 주체적인 자세를 노래한다. 건강미를 표방한 안무와 스타일링을 주된 포인트로 내세운 이들은 미국 음악 전문 매체의 메인 차트인 '빌보드 200'에서 117위를 차지했다. 이 밖에도 빌보드 내에서 총 7개 부문에서 이름을 올리는 등 전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

둘째. 선한 영향력

이들이 말하는 사랑의 화살촉은 나 자신 뿐만 아니라 세상으로 향하기도 한다. 그 누구보다 강렬하고 인상적인 발자취를 보여주고 있는 큐브엔터테인먼트 소속 걸그룹 '(여자)아이들'은 지난 3월 발매한 'I NEVER DIE'의 타이틀곡 <TOMBOY>와 10월 발매한 'I LOVE'의 타이틀곡 <Nxde>를 통해 기존의 전형적인 여성상을 탈피하고, 시청자들로 하여금 각종 해방감을 제공하는 무대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나 <Nxde>에서는 '있는 그대로의 나'라는 의미로 'Nude'라는 단어를 사용하였고, 더불어 희대의 섹스 심볼로만 여겨지던 마릴린 먼로를 오마주하며 겉모습으로 판단되는 사회상을 비판하고 나섰다. 

걸그룹 드림캐쳐(Dream Catcher) / 'Apocalypse : Save Us' 발매 쇼케이스 네이버 포토뉴스
걸그룹 드림캐쳐(Dream Catcher) / 'Apocalypse : Save Us' 발매 쇼케이스 네이버 포토뉴스

드림캐처컴퍼니 소속 7인조 걸그룹인 드림캐쳐는 한발 나서 '환경 문제'를 소재로 삼는다. 지난 4월 발표한 두번째 정규 앨범 'Apocalypse : Save us'의 타이틀곡 'MAISON'에서 환경의 비극성을 강조한다. 이와 같은 행보는 지구를 지켜야 한다는 강력한 경고성 메시지를 바탕으로 많은 관심을 끌었다. 이들은 2017년 데뷔 첫 해부터 스페인 프리마베라 사운드 페스티벌에 초청받고, 이후에도 각종 행사와 페스티벌에 초대받을 만큼 해외에서의 반응이 뜨겁다. 

마지막, 무엇보다 오리지널리티(Originality)

4세대 걸그룹에 대해 논하며 뉴진스(NewJeans)를 빼놓을 수 없다. 역대 신인 중 가장 높은 초동 판매량인 44만 장을 기록한 이들은 하이브 산하 레이블인 어도어 소속 걸그룹이다. SM엔터테인먼트의 아트디렉터로 f(x), 샤이니, 엑소 등 여러 그룹의 비주얼 디렉팅을 담당하며 아이돌 팬들에게 실력과 인지도를 각인시킨 민희진 대표의 역작이 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걸그룹 뉴진스(NewJeans) / 뉴진스 공식 트위터
걸그룹 뉴진스(NewJeans) / 뉴진스 공식 트위터

기존의 K-POP 아이돌의 데뷔 공식을 깨고 티저나 여타 프로모션 없이 데뷔 앨범의 뮤직비디오를 공개함으로써 이들을 세상에 처음으로 선보였다는 점부터 큰 이슈를 끌었다. 막강한 자본을 바탕으로 데뷔 앨범에 수록된 4곡 중 3곡을 트리플 타이틀곡으로 내세우며 세 곡 모두 뮤직비디오를 촬영하고, 데뷔일 기준 전원 10대로 이루어진 그룹의 연령대에 맞게 '하이틴팝'을 주장르로 내세우며 색다른 행보를 보인다. 하지만, 이는 어쩌면 더욱 빨라져 가는 K-POP의 순환 속에서 잃어버린 오리지널리티를 회복하는 방향성일 수도 있다. 팬들의 우상이 되는 '아이돌'로서 10대에게는 동질감을, 그 이상의 세대에게는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정서를 주된 요소로 담는다는 것만으로도 '가장 기본적인 것이 가장 좋은 것이다'라는 문구를 여실히 드러낸다. 

아이돌과 아티스트의 경계에 대해서는 여전히 갑론을박이 펼쳐지고 있다. 어디까지가 교집합이고, 누가 상위의 개념인지에 대한 기준 또한 모호하다. 명확한 교집합은 이들만이 가지고 있는 언어를 통해 절대 다수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특별한 능력이 주어졌다는 것이다. 소비자의 입장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단 하나이다. 이들의 가치를 알아봐주는 일, 여기서부터 대중 예술의 진정한 발전은 시작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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