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해운산업은 어땠을까?

삼국시대때 부터 해운을 조금씩 사용되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입지 여건 상 중국, 일본, 동남부에 위치한 부족국가와 철을 활발히 수출했다는 기록이 있다. 삼국시대에는 다른 국가의 전쟁에 파견되거나 외교를 할 때 주로 해로로 교류를 하였는데 통일신라시대에 들어오면서 사선(使船) 이라는 상선의 성격을 띠게 됨에 따라 무역이 포함돼 해운업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특히나 해운 발전과 관련되어 장보고의 존재를 잊을 수 없다. 해운업이 무역과 기능적으로 분리되지 못했던 시기 해운의 요충지인 청해에 진을 설치해 우리나라와 중국, 일본에 이르는 항로에 해적을 소탕함으로써 해상 질서를 바로잡았을 뿐만 아니라 무역권을 획득하는 등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노래를 들어오면 “바다의 왕자 장보고”가 괜히 나온 말이 아니다.

바다의 왕자 장보고가 괜히 나온 말이 아니다.

통일 신라의 해운이 힘을 실어 고려까지 그 영향이 커졌는데 일본, 중국, 대만, 홍콩에 미쳐 인도까지 퍼졌으나 육지에 의한 국경 인접으로 인해 해운업이 점점 쇠퇴하게 된다.

하지만, 해운업의 기능이 점점 분리되어 “복합운송”의 형태를 띄게 된다. 여기에서 조운제도가 그 원인인데. 중앙집권체제의 유지와 국가 방위에 필요한 자원을 이 제도에 의지해 많은 육상운송이 있었지만, 아주 미비하게 해상운송도 이용되었다. 우리나라는 민간해운 성격이 강하다. 대흥상사와 대한협동우선회사를 설립해 일반인에 대한 양식 선박 구입이 허가되는 형태로 주로 항만에 선박관리를 담당하는 소규모 해운기업으로 창설된다.

당시에는 외국 항로에 선박을 배선하여 단기간의 좋은 성과를 낼수 있었던 용도였으나 낡은 기선으로 선진화된 일본해운회사와의 경쟁은 애초부터 역부족이라 경영 어려움이 가중돼 일본에게 흡수되어 위탁된다.

우리나라 최초 서구식 해운양성기관 * 사진출처 : 한국해운신문

1895년, 조선인들이 거의 일본으로 유학가 동경상선학교에 입학해 조선인으로써 일본기술을 배운 최초의 해기사도 있었다. 당시에는 일본 선원법에 따르도록 하고, 선박직원시험을 8회 동안 실시되었는데 통과한 조선인은 불과 21명이였으며 이후 유망직업이라는 것을 알게된 많은 조선인들이 일본으로 넘어가 무려 1156명으로 38.6% 차지 할 만큼 크게 늘어난다. 19세기 초 총독부를 설치한 후 1919년 7월 우리나라 최초 서구식 해기사 양성기관인 “조선총독부 체신국 해원양성소”를 인천에 설치하게 된다. 조선인 141명, 일본인 176명이 졸업해. 항해과 157명, 기관과 160명을 최초로 양성해 우리나라 해운을 재건하는데 큰 역할을 수행한다. 특히나 일제강점기 때 해외에서 해기사로 성장해 광복 후 귀국한 사람으로 손원일, 신성모, 민영구 세 사람이 해운을 제건하는데 한 몫을 하게 된다.

왼쪽, 인천항의 과거 모습, 오른쪽 인천항의 현재 모습 * 사진출처 : 인천항만공사 공식블로그

이후, 기존의 선박관리 기능을 통합해 조선우선주식회사를 설립해 연안항로를 통합한다. 이 통합이 제1차 세계대전의 호황으로 대일항로와 러일항로에 개설해 항로 확충에 해운정책 기조를 두게 된다. 또한, 최초로 해운협회를 2차례 세워 상호간 불필요한 경쟁을 지양하고, 국가 영역권 속에서 해양활동을 원활히 수행하였다.이후 1950년대 입항물량이 182만톤이였던 물동량이 1960년대 203만톤으로 7.2%씩 증가해 자꾸만 쇠퇴되었던 해운업이 조금씩 커지기 시작한다.

근대해운으로 넘어가면서 6.25 전쟁 이후 주로 전쟁에 파괴된 항만시설 복구사업에 집중을 하다가 경제개발계획으로 농업생산력 증대와 석유화학공업 육성이라는 국가 목적에 따라 울산항, 부산항, 인천항, 포항항 등 주요 항만에 물동량 증대, 하역능력, 공업단지 건설, 항로개척을 실시한다. 외국에서 선박을 도입해 본격적인 상업해운활동을 전재해 나가면서 운임과 용선료를 통한 외화 획득과 절약 그리고, 원자재를 수입 가공하여 다시 외국에 수출하는 가공무역이 성행해 수출 주도형 한국경제의 고도성장을 해상운송 면에서 착실히 뒷받침한 역할을 수행한다.

1980년대 초 불어닥친 세계 해운업의 구조적인 불황에 의해 애써 키워온 한국해운업이 집단 도산의 위기를 맞이하며 해운산업합리화라는 이름으로 해운업체를 통폐합하고, 유예조치를 받아 겨우 살리게 된다. 이후 서구열강의 트렌드를 따라잡아 오늘날의 한국 해운업이 자리잡게 되고, 국가 개입이 되지 않은 자유주의적 다국적기업으로 변환하고 있다.

우리나라가 해운 기틀이 잡힌 것은 1962년 이후 였는데 20톤 급 이상의 기선 79척, 화물선 576척, 범선 129척 등 총 784척에 시작해 12개의 법을 구축시켜 해운업을 가속화 시킨다.

한국은 1988년 세계 선복량의 2.3%로 세계 13위의 중진해운국으로 진입했다. 경제개발계획 이후 해상물동량은 크게 증가해 총수출입화물은 1962년 369만 9,000t에서 1985년 1억 3,301만 1,000t으로 연평균 16.9%씩 늘어났고, 1척당 평균선복량은 1962년의 160만G/T 수준에서 1982년의 623만 8,000G/T 수준으로 증대되었다. 급격히 발전한 해운산업은 2008년 12월말 현재 선박보유량 세계 6위, 선박 조선 세계1위, 선박운항능력 8위로써 세계 해운의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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